기적 같은 프로젝트 사례로 배운다

프리콘

전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건설 성공 사례로 손꼽히는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프로젝트의 성공 요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높이 381.6m, 102층 높이의 초고층 건물을 짓는 데 국내에서 2층짜리 고급 주택 하나 짓는 정도인 불과 13개월 남짓한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초 예산을 획기적으로 절감한 이 프로젝트는 지어진지 약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건설 역사에 경이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프로젝트 사례를 보며 건설 프로젝트에 적용 가능한 성공방정식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90년 동안 깨지지 않은 경이적인 기록

1930년 4월 7일 첫 번째 철골 기둥이 세워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공사는 불과 6개월 만에 57,000여 통의 철골 구조물을 86층까지 완료하였다. 이 빌딩은 102층이지만 실제 거주층은 86층까지기 때문에 이로써 대부분의 철골 공사가 완료된 것이다. 테헤란로에 서 있는 20층 내외의 고층 빌딩에 소요되는 철골 구조물이 2,000~3,000톤이니 57,000톤이면 이런 건물을 약 20~30개 건설할 수 있는 물량이다.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 초는 뉴욕에서 초고층 건설 붐이 일어났던 시기로, 도시의 마천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높아져가고 있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건립 과정에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크라이슬러 빌딩과 흥미로운 눈치작전을 펼쳤다. 뉴욕의 자산가였던 크라이슬러의 월터 크라이슬러와 제너럴모터스(GM)의 존 래스콥은 과연 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지을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당초 이 빌딩의 건설 계획안을 보면 높이가 1,50피트(315m)로, 크라이슬러 빌딩 1,048피트(314.4m)보다 고작 2피트(60㎝) 정도 높았다. 하지만 실제 완공된 크라이슬러 빌딩은 1,130피트(339m)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계획안보다 80피트(24m) 정도 높았다. 크라이슬러 측이 고층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비밀리에 높이 56m짜리 첨탑을 조립해 뒀다가 완공 바로 직전에 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발주자인 존 래스콥도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크라이슬러 빌딩이 애초 계획보다 높아질 것을 미리 예상했던 첨탑을 높여 1,250피트(381.6m)로 완성했다. 그렇게 두 빌딩의 건축주는 머리를 써가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한 높이 경쟁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결국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73년 세계무역센터가 건립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 높이의 빌딩 자리를 42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 이 빌딩 건설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제너럴모터스를 이끌던 존 래스콥이었다. 그는 동료인 피에르 뒤퐁과 함께 이 건설 사업의 주요 투자자가 되었다. 이 건설 사업에 인허가를 내준 사람은 전 뉴욕 주지사이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앨프리드 E. 스미스로, 그 후 엠파이어스테이트 법인의 대표가 되어 대외관계를 총괄했다.

설계는 슈리브, 램, 하먼이 속한 뉴욕의 설계 회사(Shreve, Lamb and Harmon Associates)가 맡았다. 이들은 유명 시공업체인 스타렛 브러더스&에켄(Starrett Borthers and Eken)사와 긴밀히 협력했다. 설계사와 시공사인 이들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1930년 3월 17일 착공부터 1931년 5월 1일 준공식까지 불과 13.5개월 만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라는 ‘명작’을 만들어냄으로써, 현대 건축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완수한 팀이 되었다.

당시에는 현재 우리가 건설 현장에서 항상 보게 되는 타워크레인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장비 효율이 떨어지는 기중기(derrick)를 사용해야 했다.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콘크리트 펌프카도 없었기 때문에 인력과 자재를 운반하는 가설 엘리베이터로 콘크리트를 고층까지 운반하고 인력으로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공기 단축을 하려면 일반적으로 사람과 장비가 추가 투입되어 돌관 공사비라는 추가 경비를 요구하는 것이 업계의 관행이다. 그러나 이 공사에서는 시공 이전 단계의 프리콘 활동과 체계적인 원가 관리를 통해 오히려 공사비 200만 달러(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억 2천만 달러)를 절감하여 최종적으로는 2,500만 달러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9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같은 경이적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팀 디자인과 시공사의 관리 능력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설은 대공황 시기에 수행되었기 때문에 작업자 확보나 장비, 자재 조달이 안정적이었다. 이 공사가 시작될 무렵인 1900년대 초반 건설에서는 대부분 건설사가 직접 고용하는 직영 노무자에 의해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공사에는 절반 이상의 노무자가 하도급 형태로 공사에 참여하였고, 이는 당시에 비정상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시공사는 하도급 업체의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권한의 분배와 관리의 분권화를 기했다. 또한 타 공종과의 협업에 있어서도 협력업체들에게 재량권을 주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당시 시공을 맡았던 스타렛 브러더스&에켄이 CM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경이적인 공사 기간 단축을 실현한 성공의 이면에는 팀 디자인 방식(team design approach)이 있었다. 팀 디자인은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 엔지니어가 함께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기법이다. 설계 이전의 주요 결정과 디테일을 사전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프리콘 활동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프로젝트 초기 단계부터 시공사 및 엔지니어가 조기에 참여함으로써 시공성 및 공종별 작업 순서 등을 고려한 완성도 있는 설계 도면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방식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공사의 혁신적인 공기 단축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공사의 탁월한 관리 능력을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시공사인 스타렛 브러더스&에켄은 “프로젝트 초기부터 사업에 관여하지 않으면 아예 시공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업 원칙이 확고했다. 이 회사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 건설산업위원회 소속 비상건설부 책임자였던 막내 동생인 빌 스타렛이라는 전문가가 있었다. 그는 군대 생활 중, 단기간에 군 시설을 건설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획기적인 공기 단축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특히 1930년에 지어진 맨해튼 은행 빌딩(The bank of Manhattan building)은 1,111,675평발피트(약 3만 1천 평)의 연면적과 283m 높이에 72층 규모의 초고층 건물이었다. 이 건물을 불과 11개월 만에 완공함으로써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설을 위한 리허설 성격의 프로젝트를 미리 경험했다.

공사의 성공에는 발주자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했다. 주 투자가인 존 래스콥과 뉴욕 주지사 출신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CEO가 된 앨프리드 E. 스미스(Alfred F. Smith)는 리더십, 대외 문제 해결 능력과 탁월한 의사 결정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로젝트 팀 구성 및 권한 위임 등을 통하여 적기에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특히 존 래스콥은 자동차 회사인 GM 출신이었기 때문에, 건설 현장도 제조 공장처럼 운영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제조업 개념을 현장에 도입하였다.

설계자였던 슈리브, 램, 하먼의 설계 능력과 코디네이션 능력 역시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끌어낸 주된 성공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공사의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패스트트랙으로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추진하는 방식을 취했다. 공사가 완료된 후 시공사는 “건설 역사에서 이처럼 시공 속도에 최적화된 건축 디자인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라며 설계사의 능력을 극찬하면서 프로젝트 성공의 공을 설계자에게 돌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공사의 뛰어난 발주자의 리더십과 능력있는 설계자와 시공사의 탁월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PM) 능력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프로젝트 초기부터 팀을 구성하여 시공 과정 중 발생할 수 있는 제반 문제를 조기에 해결했던 프리콘 활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프리콘 활동의 성공을 여실히 보여주는 베스트 프랙티스라 할 수 있었다.

명확한 발주자 요구 사항

초고층 건설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이 프로젝트는, 사업에 참여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 하에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 집중함으로써 달성한 팀워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젝트 계약 전부터 설계사와 시공사에게 발주자가 요구했던 첫 번째 사항은 반드시 1931년 5월 1일에 준공식이 거행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시 사무실 임대료 기산일이 5월 1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목표 일정에서 하루만 늦어져도 임대에 차질이 생겨 수백만 달러의 손해가 발주자 측에 발생하며 하루가 늦춰질 때마다 1만 달러(현재 화패 가치로 약 58만 달러)이상의 비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처음부터 명확히 인지했다. 이들은 탁월한 능력과 일체화된 팀워크로 목표한 일정 내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또한 가능한 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세계 최고의 빌딩을 짓고자 했던 발주자의 요구 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공기 단축뿐만 아니라 공사비 절감에도 관리 역량을 집중하였다. 그 결과 당초 예산인 5,000만 달러(토지비 1,600만 달러 포함)보다 약 900만 달러(현재 화폐가치로 약 5억 2천만 달러)를 절약한 4,100만 달러 수준에서 사업을 종료할 수 있었다.

패스트트랙 기법과 공업화 설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설은 설계, 설계 관리, 조달, 현장 조직과 현장 관리, 물류와 장비 등 건설과 관련한 거의 모든 부문에서 혁신적인 도전을 단행했다. 프로젝트 수행에 앞서 공사 준공 목표 일정이 명확히 정해져 있었으나, 준공일 내에 공사를 완료하기 위해서는 설계 기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에 따라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방법인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병행하는 패스트트랙 기법이 필연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 프로젝트 이후 많은 건설 공사에서 패스트트랙 기법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건설 기간 중 17차례의 설계 변경만이 발생했다고 하는 점은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 엔지니어가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의 팀으로서 사업을 수행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또한 공사에는 현장이 아닌 공장에서 건축 부위별 유닛(unit)을 제작하는 공업화 시공 방식이 도입되었다. 건물의 외장재인 창호 공사와 창호를 지지해주는 부재인 스팬드럴, 스틸 멀리언과 석재 공사는 현장 밖에서 제작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표준화, 대량 생산함으로써 원가 절감 및 현장 시공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 일례로 여기에 적용된 금속 스팬드럴 5,704개는 18개의 유형으로 표준화되었고, 바닥 콘크리트 슬래브는 철근 대신 롤 카펫 형식으로 된 롤 철망을 사용하여 철근 배근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였다. 그 결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설의 공정 관리가 가장 성공적인 요체라고 일컬어지는 네 개의 핵심 공정(pace maker)인 철골 설치, 콘크리트 바닥 공사, 외부 금속 마감 및 알루미늄 스팬드럴(커튼월), 외벽 석재 공사가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골조 공사와 외벽 공사가 조기에 완료됨에 따라 설비, 전기, 마감 공사 등의 후속 공사들 역시 바로 진행될 수 있었고, 덕분에 추운 겨울 동안에 실내에서 내부 공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4개의 핵심 공정에서 모두 당초 계획 대비 4일에서 17일까지 공기를 단축하였고, 그 결과 당초 준공일인 1931년 5월 1일보다 한 달 앞선 4월에 실질적인 공사가 완료되었다. 공기 13.5개월조차도 다시 한 달을 더 단축한 것이다.

린 건설과 대물량 시공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설 과정에서 공사 기간을 단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건설을 보는 시각과 철학 측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린 건설과 대물량 시공(mass construction) 개념 도입에 주목해볼 수 있다. 이는 1990년대 일본 도요타의 생산 방식에서 출발한 린 생산을 건설에 도입한 건설 최적화 개염으로서, 린 건설의 철학은 낭비를 최소화하고 가치를 더하여 업무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데 있다. 린 건설 이론은 1990년대에 정립되어 발전 한 것이지만, 1930년대에 이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현장에 이와 같은 개념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린 건설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 자재는 적기(just-in-time)에 도착한다.
  • 현장 내에서 자재는 한 번만 운반한다.
  • 도착된 자재는 3일 안에 시공을 완료한다.

이와 같은 원칙에 따라 자재 생산 및 운송, 현장 제작 등의 과정이 물 흐르듯 진행될 수 있었으며, 그밖에도 표준화 설계, 공업화, 작업자 동선 최소화 등의 린 개념이 프로젝트 곳곳에 반영되었다.

대물량 시공 역시 주목해볼 만하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프로젝트는 연면적 257,211㎡의 102층 건물 규모로 57,480톤의 철골재, 48,000㎥의 콘크리트, 1천만 개의 벽돌, 6,400개의 창문, 3,500명의 피크 타임 인력이 투입된 대규모 현장이었다. 1년 만에 대규모 물량의 공사를 완료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관리나 프로덕트(product) 관리 차원의 새로운 전형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대물량 시공의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그 주된 개염은 현장을 4개의 핵심 공정에 따라 공장 조립 라인처럼 운영하는 것이었다. 동일하고 반복적인 공간 및 모듈, 택 타임을 고려한 업무 흐름, 원활한 자재 운송을 위해 설계된 물류 조달 시스템, 그리고 표준화된 업무 등을 골자로 하는 개념이다.

당시의 공사 현장 사진을 살펴보면 철골 공사가 가장 상층부에서 시공되면 그보다 3~4층 아래에서 콘크리트 바닥 공사가 진행되었다. 외장재는 9개 층 아래, 그리고 외부 석재와 유리창은 다시 6개 층 아래까지 완료되어 4개의 핵심 공정을 구성하는 골조 공사와 외벽 공사가 공장 조립 라인처럼 시스템화 되어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계작업이 공사 전체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유지됨으로써 이 모든 공정이 1년여 만에 완벽하게 완성될 수 있었다.

특별한 로지스틱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성공 사례에 대해 저술한 윌리스(Willis)와 프리드먼(Friedman)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에서 물류는 언제나 성공의 열쇠라고 주장했다. 이 빌딩 공사에 적용된, 자재와 사람의 이동을 지원하는 물류(Logistics) 계획은 지금 이 시대에도 상상하기 힘든 완벽한 수준이었다. 피크 타임에 인력 3,500여 명의 이동을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충분한 숫자의 가설 리프트와 본 공사용 엘리베이터를 조기에 가동하였다. 인력 이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정한 숫자의 간이식당과 가설 화장실을 몇 개 층 단위로 설치 운영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초고층 건설에서 인력 이동에 따른 손실을 막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콘크리트 생산 공장을 지하 1층에 설치하여 콘크리트를 자체 생산하여 공급했으며 철골 설치용 기중기 9대, 별도의 장비 인양용 기중기 2대를 설치했다. 아울러 자재 인양용 각종 호이스트 17기를 별도 설치함으로써 철골 및 자재의 수직 운반을 적기에 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그 결과 하루에 한 개 층의 골조 공사를 완료하는 공정이 가능하게 되었고 피크 타임에는 하루에 철골 구조물 포함 500대의 트럭이 현장에 도착했으나 이를 무리 없이 소화하였다. 이들은 하루 8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으므로, 1분에 1대꼴로 각종 중차량의 자재를 하역하고 운반하기 위해 공장에서 쓰는 오버헤드 크레인(Over head crane)을 1층에 설치하였고, 각 종 하역 장비를 풀가동했다. 또한 각 층에 임시 철도 궤도를 설치하여 자재들을 각 층에서 보관 장소까지 열차 화차로 신속하게 운반하였다. 철골 자재는 440마일(약 700㎞) 떨어져 있는 피츠버그 공장에서 제작되었는데, 한 달에 1만 톤의 철골을 조립하기 위해서는 매일 엄청난 물량의 철골을 운반해야 했다. 이를 위해 특별한 물류 계획이 필요하였고 그 해답으로 도심의 교통혼잡을 피하여 허드슨강을 통해 현장 인근까지 철골을 운반한 후 트럭으로 현장까지 철골자재를 운송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적기에 자재들을 현장에 공급할 수 있었다.

프리콘 활동

1) 팀 디자인 방식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발주자에게는 프로젝트 계획 당시에, 1931년 5월 1일 빌딩을 개장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능한 팀을 선정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설계자가 선정된 1929년 9월을 기준으로 목표 준공일은 20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발주자는 계획 설계도 완료되지 않은 시점인 설계사 선정 2주 만에 시공사를 선정하였다. 시공사가 초기 설계 단계부터 조기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시공사 선정 즉시 발주자는 설계와 시공에 관한 정책위원회(policy committee)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에는 발주자, 설계사, 시공사의 핵심 인원이 참석하여 1주일에 수차례씩 강도 높은 회의가 진행되었고, 평면 확정, 외관 확정 등 모든 주요 의사 결정이 이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2) CM 역할을 담당한 시공사

시공사인 스타렛 브러더스&에켄은 오늘날의 시공사와는 다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모든 공사에 있어 시공 이전 단계인 설계 초기부터 참여가 가능해야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왔다. 즉 프리콘의 중요성을 완벽히 인지한 회사였다. 이들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공사에 50만 달러의 용역비(fee)를 매달 1/n로 동등하게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고, 총 공사비에 대한, 별도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공사비는 발주자가 직불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그들의 역할은 시공사보다는 사업 관리자인 CM에 보다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설계 업무 수행 경력을 가진 설계 지식이 있는 시공사들이었고, 리허설이라 할 만한 72층의 맨해튼 은행 빌딩을 11개월 만에 완공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탁월한 공정 관리 능력과 물류 관리 능력, 그리고 건설 관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도면 없이 원가를 산출하는 능력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설계 초기에 예산과 연계하여 프리콘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예산 절감을 위한 VE(당시에는 VE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상당한 원가 절감을 실현하였다. 따라서 발주자, 설계자, 시공사 등이 참여한 정책위원회 활동은 사업 관리자 역할을 한 시공사가 주도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프리콘 활동으로 얻은 주목할 만한 성과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여 리스크를 감수하고 18,000psi 부하 계산으로 철골 도면을 준비하였고, 그 결과 철골량을 10~12.5% 절감하고, 철골 원가를 15~20% 절약하는 성과를 달성하여 결과적으로 50만 달러(현재 시세 기준 약 2,900만 달러)의 공사비를 절감하였다.
  • 가능한 많은 부재를 공장에서 사전 제작하고 현장에서는 조립만 하도록 노력하였으며, 공기를 절약할 수 있는 단순하고 경제적인 디테일이 되도록 설계사와 지속적인 협력을 수행하였다.

3) 빠른 의사결정과 문제 해결

정책위원회 멤버들 모두가 설계 초기 프리콘 활동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계의 원가, 공정, 시공성, 품질 등의 문제점을 사전에 검토하였다. 그 결과물과 디테일을 도면에 반영하는 등 철저한 설계와 시공의 통합을 꾀했다. 일반적인 건설 공사에서 설계 도면에 문제가 있을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설계자의 도면 작성 → 시공사 검토 → 설계 오류 전달 → 설계자 수정 → 발주자 승인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는 이 모든 의사결정 과정이 정책위원회의 회의를 통해 신속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프로젝트 성공에 기여했다. 프리콘을 통하여 모든 중요한 사항과 디테일이 면밀히 검토되고 나서야 공사가 진행되어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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