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콘
우리나라에서 설계자의 입지는 초라하고, 설계비는 건설 선진국에 비해 더욱 초라하다. 국내에서 재구실을 못하고 있는 실상은 앞서 다루었다. 간략히 다시 요약하자면 설계자가 대우받지 못하고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건설 시장 구조가 건설업체 위주다 보니 설계자의 위상도 미미하다.
최저가 함정에 대해서도 이미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미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독특한 비정형 설계로 유명한데, 공사비 대비 20% 가량을 받는 비싼 설계비에도 불구하고 고객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설계 관련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공사비의 약 8~10%의 설계비를 받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3~4% 정도에 불과하다. 이 정도만 돼도 잘 받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여건에서 충실한 설계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설계비는 지금 수준보다 상향되어야 하며 함부로 깎아서는 안 된다. 제대로 설계비를 인정해주고 그 만큼 제대로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 국내에서는 제대로 비용을 주지도 않고 제대로 일하지도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설계업체는 프로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대부분의 설계 사무소에서 설계 하청을 주고 있는데, 품질이 떨어지고 각 분야 간에 코디네이션이 되지 않은 도면이 현장에 보내지거나 시공성이 검토되지 않은 도면이 양산되고 있다. 프로젝트 예산에 맞춘 도면이 아니라 예산을 초과하는 도면 제작이 다반사로 생산된다. 품질을 위해서는 건설 선진국들처럼 설계 하청을 주면 안 되고, 자기 설계도에 대하여 법적으로 또 도의적으로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국에서는 설계의 품질 평가를 위한 설계 품질 지수(DQI, Design Quality Indicator)를 개발했다. 설계 품질 지수에는 시공 품질, 기능, 영향도의 세 가지 척도가 있어서, 심미적 요인으로서 설계의 기능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성능, 시공성, 유지 관리 등을 고려한 설계의 기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좋은 설계는 프로젝트를 어떻게 정의하고 추진하는지에 따라서 뿐 아니라 설계자의 역량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건설 프로젝트에서 능력있는 설계 선정은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다. 국내의 건축 설계자 선정 방식은 설계비 규모에 따라 가격 경쟁 입찰, 입찰 참가 자격 사건 심사(PQ, Pre-qualification), 디자인 빌드 방식, 현상 설계 방식, 이렇게 네 가지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설계 품질 저하를 막기 위해 설계비 규모가 작은 건축물의 경우에 한해서만 가격 경쟁을 통해 설계자를 선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전체 공공 프로젝트 중 가격 경쟁으로 설계자를 선정하는 비중이 90%에 육박하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10개의 프로젝트 중 9개가 디자인의 질을 따지지 않은 채 최저가 기준으로 업체를 선정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공에 비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여겨지는 설계ㆍ엔지니어링 업체의 글로벌 경쟁력이 시공 능력에 비해 저조한 수준이며, 시공 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설계ㆍ엔지니어링 분야에 대한 지원도 미흡한 실정이다.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미국 건축가협회를 중심으로 건축 설계 산업을 하나의 전문 분야로 발전시켜왔다. 건축 설계자를 선정함에 있어 시공 방식과 동일한 가격 경쟁 입찰 방식을 적용하기보다 자격 조건 기준 선정 절차(QBS, Qualifications-Based Selection Process)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설계는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시공업체처럼 가격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ㆍ영국을 비롯한 건설 선진국들에서는 설계를 가격으로 선정하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 자격이나 디자인 능력을 보고 선정한다.
건설이 바로 서려면 국내 설계ㆍ엔지니어링 산업의 육성과 발전을 위해 공정한 시장 환경을 조성하고, 설계 경쟁력 향상을 위한 제도적, 시스템적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설계 대가의 기준을 상향하여 합리적인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면서, 설계자가 설계 관련 소임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인 틀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설계ㆍ엔지니어링 산업 스스로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영국의 굿 디자인 운동
영국은 공공 건축의 디자인 품질을 주요 국가 정책으로 채택하여 건축․공간환경위원회를 중심으로 공공 건축의 기획 단계부터 설계 방향성을 제시하는 설계 자문(Design Enabling), 건축․도시 관련 공공사업의 컨설팅 기능을 하는 설계 검증(Design Review), 그리고 공공 건축물의 설계 품질 향상과 지속적인 관리 도구인 설계 품질 지수(DQI, Design Quality Indicator Tool)를 추진하였다. 또한 좋은 공공 건축물 포상제도(The Prime Minister’s Better Public Building Award)가 마련되었다. 이 굿 디자인 운동은 찰스 왕세자가 주도할 정도로 영국 정부에서도 중요성을 상위에 둔 건설 혁신 운동의 하나이다.
설계 품질 지수(DQI)는 공공 건축의 설계 품질 향상을 위한 지속적인 관리 도구이다. DQI는 기획 단계에 사용하는 설계 요구 사항 도구(briefing tool)와 설계 단계 이후에 사용하는 평가 도구(assessment tool)로 구성되어 있다.
좋은 건축, 좋은 디자인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고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건축을 넘어 쾌적한 도시 건설, 스마트시티(Smart City) 건설도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실천, 행복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굿 디자인 운동과 좋은 건축을 짓는 일은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숭고한 행위이다.
왜 설계는 관리되어야 할까
좋은 설계는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소가 관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획 및 계획 단계에서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좋은 설계는 좋은 건축물을 만들고, 프리콘은 좋은 설계를 만드는 종합 활동이다.
설계는 창조적인 과정인데 설계가 관리의 대상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건축을 예술로 볼 것인지 공학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입장 차이와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점은 설계는 그냥 설계 도면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설계 도면의 존재 이유는 시공을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며, 설계 도면이 시공 과정을 통해 하나의 건축물이나 시설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건물의 미적 요소는 물론이고, 구조적 안정성, 사용성, 경제성, 시공성 등 모든 요소가 고르게 만족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 건물을 실제로 사용할 때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설계업체가 갖는 속성이 있다. 이들은 예술인 감각 면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앞서겠지만, 그에 반해 현장 디테일을 포함한 시공성 문제와 제반 시장 상황을 고려한 원가 문제 등에서는 해당 분야 전문가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고, 특히 우리나라의 설계업체는 더더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이다. 당초 기획 단계에서 세웠던 발주자의 예산을 맞추기 위해서는 설계 과정에서 시공 방법, 시공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설계해야 하며, 시공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한다.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시공성이나 예산 관리 능력이 부족한 설계 업체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일은 효율적이지 못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따라서 PM/CM 업체나 원가 관리(Cost Management) 전문 업체가 필요하고, 이들이 발주자를 대신해 제반 사항을 검토해야 한다. 프로젝트별로 발주 방법에 따라 시공업체가 설계 단계부터 개입하여 이러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PM/CM 업체와 시공업체의 이러한 활동이 디자인 매니지먼트이다.
건설 프로젝트의 총 생애 주기 측면에서 보면, 설계 단계는 다른 단계에 비해 비교적 적은 자금이 투입된다. 하지만 설계 단계에서 결정된 건물의 디자인, 구조, 자재, 설비 방식 등으로 인한 운영비용은 건설의 총 생애 주기 동안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발생하게 된다. 설계 시 건물 생애 주기 비용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이다. 설계는 건설 프로젝트 모든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의사 결정의 총합체라고 할 수 있다. 설계 과정에서 시공성, 경제성 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설계된 디자인, 구조 방식, 빌딩 시스템 등은 건설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에도 계속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실제로 건설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경우, 상당수는 설계 문제에 그 원인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예로, 우리 국민 모두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역시 설계의 책임 부재가 가져온 대참사였다. 삼풍백화점은 건물의 하중을 견디는 기둥 등 구조 부위에 대한 구조 설계가 잘못된 데다가 엉터리 부실시공을 하였다. 게다가 건축주가 마음대로 건물 구조적인 안정성에 문제가 되는 시설을 바꾸는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502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37명이 중경상을 입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불러온 대형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삼풍백화점 사고는 건축주, 불법 허가를 내준 관청, 건설 기술자들이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매우 후진적인 참사였다.
시공성 검토는 건설 프로젝트의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공을 준비하는 전반전 업무 중 하나이다. 설계 단계의 시공성 검토는 시공의 명확한 방향과 길을 제시하고 시공을 하면서 지켜야 할 규칙과 관리 포인트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아울러 공기와 원가를 줄일 수 있는 효율적인 공법과 구조 시스템을 설계에 반영하여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품질, 안전의 문제점을 사전에 검증하고, 계획된 사업비와 사업 기간이 지켜질 수 있도록 사전 검증 절차를 거친 후 공사를 시행함으로써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게 된다.
설계를 PM/CM이나 능력있는 발주자 그룹이 관리하면, 미적 요소, 기능적 요소와 더불어 원가, 품질, 시공법 등의 요소를 설계 진행 단계에서 검토하고 시뮬레이션하여 설계 요소에 대한 결정을 적시에 수행함으로써 설계자가 설계 진행을 빨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따라 공사가 조기에 착수될 수 있으며 아울러 설계도의 품질이 향상돼 시공 단계에서 설계 변경을 최소화되고,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이끌 수 있다.
단계별 설계 관리
설계의 4단계는 개념설계(Concept Design), 계획 설계(Schematic Design), 기본 설계(Design Development), 실시 설계(Construction Document, 시공도면)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계획 설계 분야가 무시되거나 경시되고 있고, 많은 경우에는 ‘가설계’라는, 투입된 노력에 대한 보상도 없고 따라서 면밀한 과업이 될 수 없는 이상스러운 과정으로 대체되면서 더더욱 글로벌 경쟁력을 잃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외국에서는 주요 프로젝트를 설계할 때 설계의 4단계를 설계도서의 완성도에 따라 더욱더 세분화하여 프로젝트를 관리하기도 한다. 예컨대 계획 설계를 더욱 잘게 쪼개 계획 설계 25%, 50%, 75%, 100%로 나누어 설계를 진행한다. 프로젝트에 대한 의사 결정은 세분화된 설계 단계별로 비용과 일정, 시공성 검토를 토대로 이루어지며, 발주자 요구 사항이 설계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확인한 후 비로소 다음 설계 단계로 진행된다. 설계 각 단계별로 해야 할 일, 의사 결정을 내여야 할 일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설계 과정은 전술한 대로 의사 결정의 연속이며, 건설에 필요한 기초에서 뼈대, 치장까지의 의사결정은 반드시 전후가 있다. 전후가 뒤집히거나 먼저 의사 결정을 하고 가야 하는 설계 이슈를 결정하지 않고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면 그 프로젝트는 필연적으로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많은 시간과 경비가 들어간다. 건설 선진국에서 설계의 완성도 관리를 철저히 하게 된 배경에는, 설계비가 비싸기 때문에 설계가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전 단계의 설계 이슈를 제기하면 다시 설계를 수정해야 하고 이에 따른 추가 보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설계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각 단계별로 완료해야 할 설계 목표인데, 국내에서는 설계 목표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시공 전 단계에서 비용이나 공법, 일정 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채로 설계가 진행되면서 나중에 재작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제대로 설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젝트가 수행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예를 들어 패스트트랙으로 공사를 진행하는 프로젝트라면, 전체 설계는 계획 설계 단계까지는 완료하고 계획 설계 다음 단계인 기본 설계 단계를 공사 순서에 맞춰 지하층 골조 설계, 지상층 공사 단계별 골조 설계, 지하층 마감 설계, 지상층 마감 설계 순으로 진행한다. 이때 계획 설계가 완료되었다 함은 엘리베이터 샤프트가 들어가는 주요 구조체가 확정되고 평면의 모든 수치가 확정되어 향후 변경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계획 설계 단계에서 구조체 공사와 마감 공사의 디테일에 관한 매우 치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도면도 없이 공사를 시작하거나 조각 도면으로 공사를 하는 것을 패스트트랙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 패스트트랙은 고도의 설계 관리 능력과 전문성이 필요한 방식이다.
이처럼 국내의 잘못된 설계 관행과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벗어난 업무 절차 등은 국내 설계업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설계 경쟁력 저하 문제는 비단 설계업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건설 프로젝트에서 설계는 모든 단계의 기본이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낮은 설계 품질이 가져오는 프로젝트의 실패나 성과 부족은 발주자, 시공자, 사용자 모두를 불만족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최근 건설 프로젝트는 대형화, 복합화 추세가 보편화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사업비 상승, 공기 지연 등 리스크 요인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리스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업 초기에 올바른 프로젝트 방향 설정과 주요 의사 결정이 제대로, 제때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의 CMAA에서는 설계 단계에서 해야 할 관리 활동을 프로젝트 관리, 비용 관리, 일정 관리, 품질 관리, 계약 행정, 친환경(지속 가능성), BIM 적용 등으로 구분하여 각 활동별로 상세 업무를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설계는 설계 단계별로 건설의 주요 구성 요소인 비용, 일정, 품질ㆍ안전 등이 검토되고 검증되면서 다음 단계의 설계에 진입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프리콘의 핵심인 디자인 매니지먼트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