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주자 조직 구성이 중요하다

프리콘

발주자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분하려면 발주자 개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발주자 조직을 잘 구성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공공 발주자는 다수의 건설 공사를 발주하기 때문에 대부분 건설 발주를 위한 별도의 조직을 갖게 된다. 공공 발주자가 아니더라도 제조 공장이라든가 데이터 센터와 같이 지역별로 많은 건설 물량을 필요로 하는 민간 발주 기관도 건설 프로젝트만을 관리하는 조직을 따로 보유하기도 한다. 반면에 건설 발주가 극히 드문 민간 발주자들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건설 프로젝트 발주를 위해 별도의 관리 조직을 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조직에서 건설 발주가 자주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발주자의 조직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발주자의 조직은 기본적으로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슬림한 구성이어야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계만 하더라도 건축, 구조, 설비, 전기, 통신, 토목, 조경 등의 전문가가 필요하며, 원가 전문가, 공정 전문가, 각 분야의 시공 전문가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을 다 고용할 수도 없고 일회성 발주자가 몇 명의 건설 전문가를 고용하는 경우에는 전문성과 신뢰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능력이 되지 않고 투명성이 부족한 발주 조직의 책임자가 의사 결정에 주요한 역할을 할 때, 프로젝트의 성공은 요원해진다.

발주자 조직은 관련 분야의 외부 전문가를 적시적소에 활용하면서 조직의 운영을 유기적으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에는 필요한 외부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조직 구성을 탄탄히 하고,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최소의 인원만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 하부 조직으로 KLCC 건설 본부를 현장 내에 두어 공사에 대한 대부분의 권한을 위임하고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흥미롭게도 약 35명에 이르는 외국의 CM회사에서 파견된 CM 전문가들을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팀의 주요 위치에 배치시켜 발주자인 다수의 현지인들과 통합 조직(integrated team)을 형성하도록 했다. 이들은 책임과 권한을 모두 갖고 모든 의사 결정 과정과 설계, 공사 추진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에 맞는 직책도 부여되었다. 이러한 조직 형태는 ① 외국 전문가에 의한 내국인의 교육, 훈련을 목적으로 실제 프로젝트를 통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기법의 전수, ② 갑과 을의 관계를 떠나 PM/CM 조직과 발주자가 한 팀이 되어 원활한 의사소통, 신속한 의사 결정 등 다목적을 가진 시도였다. 이러한 발주자와의 통합 조직은 건설 선진국에서는 흔히 있는 사례이다.

KCC 프로젝트 사례는 업체와 발주자가 갑을 관계를 떠나 하나의 단일팀으로서 사업의 성공을 위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우리 건설산업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선진 기술력과 매니지먼트 능력을 적절히 활용하여 발주자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것이 대형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느낀 경험이었다.

일류 발주자가 되려면

게임의 룰을 만드는 주체이자 프로젝트 구심점으로서 발주자의 역할과 발주자 조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 이제 현재 건설업계에서 체감하는 공공 발주자의 역량은 어느 수준이고, 발주자의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 선진국에서는 사후 평가를 철저히 하는데 반해, 우리나라 공공 프로젝트에는 사후 평가 시스템이 없다. 이는 핵심 성과 지표(KPI)가 없다는 말이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평가를 하지 않으니 제대로 개선이 될 리 없고, 책임을 지지 않으니 무책임한 프로젝트가 난무한다. 프로젝트 사후 평가만 잘하더라도 많은 개선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영국 등 건설 선진국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이다.

업계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은 발주자의 사업관리 능력에 대한 개선 필요성이다. 공기 및 사업비, 품질 관리 등 발주자의 감독 관리 역량,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 결정, 분쟁 대처 능력 및 사업자 간 조정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발주자의 역량 수준이 낮은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연구에서는 발주자의 요구 역량 기준 부재, 발주자 책임의 분산 및 불명확으로 인한 사업 평가 부재, 발주자의 재량 및 자율성 부족 등을 문제로 꼽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발주자가 건설 프로젝트에서 자기 역할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필요한 전문 지식과 관리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건설 사업의 관리, 감독자로서 갖춰야할 프로젝트 관리 지식이 대부분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주목할 점은 단순히 실무 지식 교육뿐만 아니라 하나의 팀으로 작동할 수 있는 공감대 형성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교육 프로그램의 이수자에게는 프로젝트 디렉터 자격이 부여되기도 한다.

그들의 일류 발주자 만들기 전략과 교훈의 키워드는 다음 네 가지이다.

① 일류 발주자의 중요성과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② 발주자에게도 자격이 필요하다.

③ 일류 발주자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④ 일류 발주자는 시스템으로 완성한다.

선진국의 발주자 혁신 운동

⑴ 일류 발주자란 어떤 발주자여야 하는지 이해하고 학습하라.

⑵ 발주자는 건설 사업을 맡겨두고 뒤로 한 발 물러서 있는 주체가 아니다. 건설 사업의 적극적인 리더가 되라.

⑶ 발주자 측 인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나 발주자 측 사업 관리 책임자로 임명하지 마라. 사업 관리 역량과 경험을 갖추고 해당 사업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발주자 측 사업 관리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

⑷ 건설산업계가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까다롭고 높은 품질을 요구하라.

⑸ 무난한 사업자가 아닐 제대로 된 사업자를 선정하라. 그들의 퍼포먼스를 까다롭게 평가하고 관리하며 지속적인 성과 향상을 요구하라.

⑹ 갑을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통합된 팀으로서 팀워크를 바탕으로 함께 일하라.

⑺ 제일 싸구려가 제일 경제적이라는 인식을 버려라.

⑻ 발주자가 똑똑해야 건설산업계를 똑똑하게 활용할 수 있다.

⑼ 발주자가 똑똑해지는 방법은 스스로의 역량을 향상시키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⑽ 사업 승인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눈가림용’ 공사비와 공기 목표 등을 제시하지 말고 건설 사업에 내재되어 있는 리스크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⑾ 공공 건설 사업에 대해 보다 상업적 마인드를 가져라.

전술한 대로 그들의 캐치프레이즈는 “건설 사업에서 부실이 생긴다면 그건 발주자의 책임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건설업계 간 파트너십 구축을 통해 산업의 비효율성이 제거되고 공기 단축과 사업비 절감이 이루어지면서 발주자와 사업자가 상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건축이야기—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중세의 성채 같기도 하고 우주 정거장 같기도 하다.

배처럼 보이기도 해서 바람이 일면 강을 따라 흘러갈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동서고금의 수많은 건축물을 보면서 이토록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스페인 북부 빌바오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물었다.

1997년 세계적인 천재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설계로 2만 4천㎡의 전시 공간을 갖춘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술관은 상자 모양’이라는 고정 관념을 완전히 깨부순다. 여러 개의 긴 조각으로 해체한 뒤 다시 조합해 만든 건축물은 대칭도, 비례도, 균형도 무시된 듯 생소한 형태지만,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신선하고 역동적이다.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구불구불한 티타늄 금속 패널들은 은은한 빛을 내뿜는데, 이 때문에 구겐하임 미술관은 ‘메탈 플라워’라고도 불린다. 미술관을 덮고 있는 0.4㎜ 두께의 물고기 비늘 모양 티타늄 패널들은 1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을 만큼 견고하다고 한다.

이토록 기묘한 형상의 건물 외관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든다. ‘미술품’보다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니 ‘주객전도(主客顚倒)’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미술관 실내로 들어서자 고딕식 대성당 느낌이 드는 50m 높이의 아트리움 천장과 수많은 곡면 구조물들이 신비감을 자아냈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20세기 인류가 만든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극찬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독특한 외형으로만 기억하기엔 건축물이 갖는 상징성이 크다. 이 미술관은 쇠락한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지역의 랜드마크로 우뚝 섰다. 바스크 자치 정부는 불황의 늪을 벗어날 타개책으로, 당시 유럽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구겐하임 미술관의 분관을 유치하고, 1991년 지명 설계 공모전을 통해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그렇게 현대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건축물이 탄생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1997년 개관 이후 2천만 명 이상이 빌바오를 다녔고 해마다 약 5억 달러의 직접적 경제 효과를 낳는 것으로 미술관 측은 추산하고 있다. 이후 미술관 주위에 대형 호텔, 공연장, 컨벤션 센터 등이 들어서면서 빌바오는 국제적 문화 단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술관이라는 문화 공간이 일으킨 하나의 ‘기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빌바오 도시 재생의 성공 이후 세계 여러 도시가 세계적인 건축물을 지어 도시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데, 이를 ‘빌바오 효과’라고 부른다. 쇠락한 도시가 랜드마크에 의해 부흥하는 사례는 현대에 들어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철강 도시였던 피츠버그는 서비스와 예술 산업을 유치해 쇠퇴하던 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도쿄의 새 랜드마크 스카이트리 역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무너진 일본의 재건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바스크 자치 정부는 기존 공업 중심의 도시 산업을 문화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명확한 비전을 갖고, 국제적 명성을 얻을 수 있는 미술관을 유치하고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김으로써 그 비전을 실현하였다. 명품 발주자가 명품 건축물을 낳는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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