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시장 구도

프리콘

우리 건설산업은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 건설의 주축을 담당했던 기간산업이었으며, 수많은 공장, 주택, 도로, 댐, 항만 등 국토건설과 도시건설을 주도했다. 또한 1970년대 초부터 해외 진출을 시작하여 중동의 오일머니를 다량으로 벌어들였고, 이를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등에 재투자함으로써 후발 산업들을 일으켰으며, 이들이 세계적인 산업으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건설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또는 ‘스타(Star)산업’이라 불리며 주목받았다. 크고 작은 회사들이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건설사를 배후에 둔 기업들이 대형화, 사업 다각화에 성공하면서 재벌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공 위주의 건설 회사들이 대형화, 글로벌화되었다.

그러는 동안 설계 회사나 엔지니어링 회사는 상대적으로 국내에 안주했고, 건설 회사와 함께 해외 동반 진출했지만 하청 등 수동적인 역할만 맡다 보니 자체적으로 성장했는데 반해, 설계업체들은 몇몇 업체를 제외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규모나 경험 면에서 일천했다.

그 결과 국내 건설산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은 시공 중심의 건설 회사가 맡게 되었고, 건설 회사가 주도하는 시장 구도가 점차 고착화되었다. 정부의 건설산업 정책이나 발주 정책도 대부분 건설 시공 관련 정책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형화된 건설 회사는 비록 해외에서 시공 능력만큼은 인정받았지만, 외국

글로벌 업체들과는 달리 엔지니어링, 설계 배경의 시공업체 즉, E.C(Engineering Construction)업체로 재탄생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상대적으로 하드웨어적인 성장은 했을지 몰라도, 소프트웨어적인 성장은 그에 못 미친 것이다. 그에 따라 외국의 선진 소프트웨어 업체인 PM, 설계, 엔지니어링 업체가 만들어 놓은 프로젝트에서 이들 선진 업체의 지시나 감독하에 하드웨어적인 시공 위주로만 성장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아파트 경기 호조와 정부 공사에 힘입어 물량 위주의 경영을 하다 보니, 건설의 본원적 경쟁력인 신기술 개발, 원가 절감, 공기 혁신 등 기술적인 향상과 질적 향상 노력은 소홀해졌다.

그러다 보니 건설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취약해졌고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글로벌 경쟁력 향상을 향한 적극적인 도전에 소홀했던 탓에, 최근 10여 년간 해외에서 엄청난 물량의 수주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대규모 적자와 대형 부실을 반복적으로 초래하였다. 심지어는 단일 프로젝트에서 10억 달러(약 1조 2000억 원)이상 적자가 나는 프로젝트도 여러 건 발생하였다.

아울러 글로벌 스탠더드에 미치지 못하는 국내 조달 제도와 폐쇄적인 시장 구조 때문에 외국 선진 건설 기업이 활동하기 어려운 갈라파고스 같은 건설 시장이 형성되었다. 미국이나 서구권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나라마다 정도 차이는 있어도 외국 건설 기업이 진출하여 서로 활발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유독 외국 건설기업의 활동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큰 이유는, 건설 시공업체를 보호하는 각종 제도와 불건전한 생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 선도 산업과는 달리 국내에서 치열한 경쟁 환경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채, 건설 기업들은 하드웨어 중심으로 일하고 있으며, 소프트웨어 역할을 감당할 설계, 엔지니어링 업체들은 시공업체에 종속되는 관계로 전락하고 있다.

건설 시공 기업들은 국내 저가 위주의 발주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선(先) 수주 후(後) 설계 변경이라는 비정상적인 손익 만회 작업에 관행처럼 몰두한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다 보니, 불투명하고 불건전한 사례들이 건설 기업들의 이미지 추락과 신뢰 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한국 건설산업의 위기의 중심에 있는 ‘신뢰의 위기’를 지적했다. NGO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시각, 소비자의 시각이 건설 기업들을 불신의 집단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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