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사의 낮은 위상

프리콘

국내 건설산업은 최고 가치(best value)를 창출하고 상생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지 못하고, 악순환 생태계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건설의 소프트웨어인 설계 엔지니어링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시공 위주의 생태계로 건설산업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진단할 수 있다.

공급자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을 만들고 이를 개선하지 않고 있는 정부의 책임과 공공 발주자가 갖고 있는 문제점도 우리 건설 생태계를 불건전하게 만드는 데 큰 책임이 있다.

건설사 위주로 시장이 형성되다 보니, 개발 제안 사업이나 설계 시공 일괄 입찰(Design Build) 등에서 설계사가 시공사의 하청업체 수준으로 전락하는 현상이 종종 발생하면서 설계 엔지니어링 산업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형 건설 회사들은 정부에게 공사 발주시 최저가의 부당성을 주장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아파트 설계 업체를 선정할 때에는 일부 대형 업체의 경우 입찰을 통하여 무조건 최저가를 제시한 설계업체를 선정하는 사례도 흔히 목격된다. 이러한 하청 구조의 먹이 사슬이 작동하면서, 설계 배경의 감리업체나 PM/CM 업체가 대형 건설업체를 제대로 감독하거나 리드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어렵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설계와 시공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설계사와 시공사가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단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 국내 조달 방식과 관행은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동떨어진 방식이고 질적 수준도 매우 낮아 국내에서 하던 방식대로 해외에서 그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국내 건설의 경쟁력이 떨어진 원인은 우리나라의 낮은 설계 품질과 낮은 설계사의 위상 등 잘못된 관행에서 찾을 수 있고, 프로젝트 실패의 원인은 설계사의 설계 수준과 역할 상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영미권과 EU의 건설 선진국에서 설계업체의 위상은 대단히 높으며, 역사적인 건축물이나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걸작을 남긴 건축가는 널리 이름이 알려지고 건축물 앞에 그들의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지만, 시공사 이름은 대개 기억하지 못한다. 핀란드의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르 알토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핀란드 화폐에 초상이 새겨져 있고, 세계적인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스위스 화폐에 초상이 새겨져 있다. 건축가나 엔지니어들이 높은 수준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설계자의 권한이 너무 강하여 설계자의 역할을 조금 축소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논의가 대두되고 있으며, 종합 건설 회사(General Contractor)는 점점 역할이 축소되면서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어서 건설 회사 무용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우리 설계업체는 공급자와 수요자 양쪽 모두에 문제가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설계, 디자인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부여하지 않는 분위기도 큰 문제다. 설계자를 잘 대우해주고 설계자를 선정할 때에는 저가 위주로 선정하지 말고 최종 건축물이 가져올 가치 위주로 선정해야 하며, 설계자들은 건설 프로젝트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프로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설계자는 고객은 물론이고 전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술인이 될 수 있도록 자기반성과 혁신에 지속적으로 매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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