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프리콘-성패를 결정짓는 리허설

프리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고대로부터 지어진 위대한 건축물은 대부분 마스터 빌더(master builder)에 의해서 탄생했다. 마스터 빌더는 설계와 시공 모두를 총괄했으며, 설계는 물론이고 시공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와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을 대표적인 마스터 빌더로 꼽을 수 있겠다. 당시에는 마스터 빌더를 중심으로 모든 건설 행위가 이루어졌다. 미국에서는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 회사가 건설 프로세스에 관련된 모든 일을 담당하면서 고대와 중세 시대의 마스터 빌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오늘날 건설에 요구되는 성능 조건이 지능화, 스마트화 되어 감에 따라 건설 기술도 진화하면서 이를 담당할 전문성 있는 업체들의 참여가 필수 요건이 되었다. 이는 건설 활동 분야의 세분화로 이어졌다. 건설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유형이 매우 다양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건설 프로그램 관리(Program Management)』의 저자 척 톰센(Chuck Thomsen)은 “우리의 산업은 전문화되고 또한 파편화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옛말이 있다. 전문화되고 파편화된 건설 활동은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상호 협력 및 통합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특히, 건설 프로젝트의 밑그림과 모든 계획이 구상되는 초기 단계, 즉 시공 이전 단계에서의 상호 협력 및 탄탄한 기획력이 곧 건설의 성공을 담보하는 열쇠가 되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시공 이전 단계 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이 잘 정립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공사 단계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설계 단계에서 해야 할 결정을 미룬 채 일단 공사에 착수해서 뭔가를 정하려 한다거나 변경하려 한다면, 시간과 비용 손실이 매우 크게 발생할 것이다.

건설 프로젝트에서 시공 이전 활동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공적인 시공 이전 활동을 위해 요구되는 핵심 성공 요인들을 제안하며, 시공 이전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설계와 시공의 분리 현상이 심화된 국내 건설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의 건설 소프트웨어를 강화시키기 위한, 시공 이전 활동에 대해 지금부터 주목해보기로 하겠다.

초기 기획 단계는 왜 중요한가

프로젝트를 직접 개발하여 분양이나 임대를 하는 개발 사업은, 프로젝트가 위치한 입지(Location)가 굉장히 중요하다. 발주자가 직접 사용하는 사무실이나 공장의 경우에도 두말할 나위 없이 입지가 중요하다. 또한 프로젝트 개발이나 건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타당성 조사(Feasibility Study)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건설 프로젝트가 당초 계획했던 목표를 달성하고 성공하기는 힘들다. 해외 전문가들은 프로젝트의 초기 기획 단계가 프로젝트 성공에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한다.

프로젝트 기획 단계는 프로젝트의 전체 방향을 잡는 첫 단추를 끼우는 단계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프로젝트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 단계는 발주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의 전체 얼개와 프로젝트 헌장(Charter)을 만들고, 프로젝트 관리 계획(PMP, Project Management Plan)을 작성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획에는 시공업체 선정 등 조달 전략 또한 포함되어야 하며,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설계자를 선정해야 하는 단계이다. 설계자 선정에 앞서 발주자의 요구 사항(Owner’s Requirement)과 이를 디테일하게 반영한 공간 계획(Space Program)과 더불어 설계 요구 사항(Design Requirement)을 준비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이 과정을 소홀히 하거나 대충하는 경향이 있고 설계업체가 대신 맡아서 하는 경우도 많다. 그 결과 설계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빈번히 발생하고 시공 과정에서 잦은 설계 변경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현상이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설계업체를 선정하는 일은 프로젝트 성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떤 방식으로 해당 프로젝트에 맞는 후보 업체를 선정하고 어떻게 설계업체를 선정하는가도 상당한 전문성과 발주자의 철학이 개입된다. 탁월한 설계자를 선정하면 프로젝트 오너를 비롯한 모든 프로젝트 이해 당사자가 편해지고 프로젝트 성공 확률도 높아진다.

그리고 기획 단계에서는 프로젝트 전체의 예산 수립, 사업 기간 확정, 품질, 안전 계획 수립, 프로젝트 생애 주기 비용뿐 아니라 친환경, 에너지 절약 방안을 반영한 지속 가능성도 검토되어야 한다. 아울러 3차원 설계 기법인 BIM 도입도 세밀히 검토되어야 한다.

프로젝트 초기 단계인 기획 단계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프로젝트 전체의 마스터 플랜을 짜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를 소홀히 하면 프로젝트가 방향성을 잃고 성공하기 힘들다. 마스터 플랜 작성은 전문성과 경험이 중요하며 발주자와 PM 업체 등 전문 조직의 철저한 협업이 요구된다. 기획 단계가 프로젝트의 첫 단추를 끼우는 단계이며 프로젝트 성패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프로젝트 관계자들이 확실히 인식해야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다.

프리콘 활동에 대한 인식 전환

프리콘 활동이 프로젝트 성공의 필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내 건설산업에서는 프리콘의 개념이 잘 정립되지 못하고, 프리콘 활동의 중요성이 간과되어왔다. 국내 건설 시장에서도 초대형 프로젝트 발주가 증가함에 따라 프로젝트의 대형화와 복합화 추세가 보편화되고 있어, 제대로 프로젝트가 관리되지 않는 경우 사업비가 늘어나고 공기가 지연되는 등 리스크 요인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업 초기에 전문가 그룹을 참여시켜 올바른 프로젝트 방향 설정과 주요 의사 결정을 적시에 제대로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체계적인 프리콘 활동이 실행되지 못하여 사업 초기에 기회를 상실하는 일이 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공사를 수행하는 시공 단계에서 잦은 시행착오를 겪고 그에 따라 사업비와 사업 기간이 크게 초과되어 결국 고객 불만족과 불신을 초래하게 된다.

국내 건설산업에서 프리콘 활동의 중요성이 낮은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설계 시공 분리 발주와 같은 발주 방식 자체가 문제이다. 설계는 설계업체에서 하고 시공은 시공업체에서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프리콘 활동을 수행하고 발주자를 돕는 조직화된 전문 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부족, 초기 단계의 비용 부담과 외부 용역에 대한 이해 부족, 초기 단계 일을 소홀히 해놓고 잘못된 부분을 나중에 고치려는 업무 관행 일반화 등이 원인이다. 또한 프로젝트 리스크를 시공사나 협력업체에 전가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발주자들의 성향도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 영국 등 건설 선진국에서는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프리콘 단계를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고 프리콘 활동의 강화를 위해 많은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시공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사전에 검증하고, 계획된 사업비와 사업 기간이 지켜질 수 있도록 프리콘 단계에서의 사전 검증 절차를 거친 후 공사를 시행함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여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프리콘은 건설 프로젝트의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공을 준비하는 전반전 업무를 수행하며, 후반전인 시공을 시뮬레이션해보는 활동이다. 풀어 설명해보면, 도상에서 미리 지어보기를 하면서 각종 문제점을 개선하고 프로젝트의 원가, 일정, 품질 목표를 세밀히 점검하여 이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상태로 시공이라는 후반전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에서는 전반전에 실패하더라도 후반전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만회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건설에서는 전반전의 실패는 대부분 프로젝트의 실패로 그대로 이어진다. 성공적인 전반전 없이는 성공적인 건설 사업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프리콘 활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프리콘 유형의 이해

프리콘 활동은 시공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 활동으로서, 수행 주체나 계약 방식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발주자나 발주자 대리인인 프로젝트 관리자(PM)나 건설 사업 관리자(CM)가 프리콘 활동을 주도하거나 발주자 내부 조직이 이를 담당한다. 두 번째는 건설업체가 자체적으로 시공 준비를 위한 제반 활동, 즉 설계도면 검토, VE(가치공학) 활동과 원가, 공정 등을 사전 검토하는 활동을 수행하는 도급자로서 시공의 사전 준비 활동을 담당한다. 세 번째 유형은 두 번째와 비슷한데, 최근 대두되고 있는 IPD 방식으로 시공자의 조기 참여 개념으로서의 프리콘 활동이다. 건설업체가 프리콘 서비스를 통해 프로젝트에 조기 참여함으로써 시공 책임형 건설사업관리 등의 계약 방식으로 발전하는 프로젝트 발주 방식의 한 영역으로, CM/GC(Construction Management/General Contractor)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설계 이전 단계, 설계 단계, 발주 단계를 총칭하여 발주자를 위한 프리콘 활동을 하는 첫 번째 유형의 프리콘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프리콘 활동은 시공의 명확한 방향과 길을 제시하고 시공을 하는 동안 지켜야 할 규칙과 관리 포인트인 제대로 된 도면과 시방서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시공이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프리콘 활동의 주 대상이 되는 설계도면, 시방서, 원가 계획, 공정 계획, 품질 계획 등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콘 활동은 프로젝트를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한 계획과 경쟁력 있는 설계 도면을 작성하는 데 연관된 프로젝트의 사전 계획 활동이다. 끊임없이 사전 품질 관리와 일정 관리, 목표 공사비 설계(Target Cost Design) 기법을 통해 지속적인 원가 관리를 하며, VE와 시공성 검토를 수행한다. 아울러 시공을 담당할 좋은 건설 파트너를 선정하는 일도 프리콘 단계에서 중요한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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