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콘
마스터 빌더와 기능의 분화
과거에는 마스터 빌더(Master Builder)라고 해서 설계와 시공 등 모든 과정을 한 사람의 장인으로 담당했다. 모든 건설 행위는 마스터 빌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마스터 빌더는 건축가이자 수학자이고, 또한 공학자였다. 건축의 3요소인 구조, 기능, 미를 제창한 로마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건축가는 학자이고 숙련된 제도사, 수학자여야 하며 역사적 지식에 익숙하고 철학을 즐겨하고 또한 음악과 친숙하고 의학을 아라야 하며, 천문학과 천문학적 계산에도 능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의 건축가는 예술, 철학, 이학, 공학 등 모든 영역에 해박한 만능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절대 군조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이들은 수많은 노예와 평민을 동연하여 예산이나 일정에 관계없이 프로젝트를 추진하였고, 인류 역사상 위대한 건축은 그렇게 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건설의 성능 요구 조건도 지능화, 스마트화 되었고, 이를 담당할 전문성을 가진 업체들의 참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건설의 다양한 영역들이 보다 전문화, 고도화되면서 건설 활동이 점차 세분화되었으며, 당연히 예산이나 일정이 건설의 중요한 관리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마스터 빌더에 의해 건설이 이루어질 때와는 다르게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업무의 분화로 설계, 구조, 설비, 시공 등 보다 전문적인 영역이 구축된 결과 효율성은 향상되었지만, 한 사람이 건축을 총괄할 때에 비해 참여자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고, 상호 협력이 부족해지고, 전체를 관리하는 능력이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과거에 비해 일정이나 원가 측면에서 당초 계획을 상당히 초과하는 프로젝트들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발전된 전문화가 실제로는 전체 프로젝트의 효율성이나 가치를 떨어뜨리고, 발주자의 궁극적 이익을 해친다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설계 시공 분리 발주 방식은, 단순 반복형 프로젝트의 달성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날로 복잡해져가고 고도화되는 프로젝트에서는 오히려 수많은 중도 계약 변경을 발생시키고 공기 연장과 공사비 증가를 야기하여 원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설계와 시공이 각기 다른 주체들로부터 제각각 수행되면서, 잦은 설계 변경, 재작업, 시공성 결여 등의 문제점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건설 주체 간의 상호 갈등을야기하고 건설 프로젝트 전반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대형화되고 복잡성이 더해지는 건설 프로젝트에 어떤 프로젝트 수행 방식을 적용해야 발주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지를 묻는 본질적 질문이 대두되었고, 이에 대해 답을 구하려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통합된 조직 안에서 여러 주체가 하나의 팀으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프리콘 활동과 같은 통합형 프로젝트 매니지먼트(PM/CM) 방법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 애증의 삼각관계
건설 프로젝트를 이끄는 3대 주체는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로 대표된다. 발주자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설계자는 발주자가 구상한 프로젝트를 미적 감각을 기반으로 형상화하며, 시공자는 설계자가 제작한 도면을 가지고 결과물을 창조한다. 설계자와 시공자는 양쪽 모두 발주자가 구상한 프로젝트를 구현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설계자는 설계 도면에 발주자의 요구 사항을 구현하며, 시공자는 특정 부지에 건축물이란 제품을 직접 만든다. 설계와 시공은 발주자의 요구 사항을 구현하는 대상이 다르며, 설계와 시공에 요구되는 전문성도 각기 다르다. 대학 교육에서도 일반적으로 설계자를 양성하는 교육과 시공 엔지니어를 양성하는 교육이 분리되어 있다.
시공은 설계도면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설계와 시공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 또는 종속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설계와 시공이 분리되면서 상호 영역에 대한 지식이 떨어지고, 발주자의 목적물인 건축물이나 구축물을 구현하는 데 하나의 팀이 되어야 하는 설계, 시공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핵심은 시공성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 도면이 만들어지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도면이 현장에 주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데에 있다. 시공사는 이를 가지고 자기 편리한 대로 시공하기도 하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설계자는 시공을 잘 모르고 시공자는 설계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발주자는 프로젝트 관리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조율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전통적인 설계 시공 분리 발주 방식에서 발주자와 설계자, 발주자와 시공자는 상호 간 계약 관계를 맺지만 설계자와 시공자는 계약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설계자가 만든 설계 도면의 오류 때문에 공사 기간이 지연되거나 공사비가 증가하더라도, 시공자는 설계자에게 책임을 물을 권한이 없다. 따라서 설계 오류에 대해 시공자가 클레임을 제기할 경우 발주자가 설계자를 대신해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런 경우 설계자의 잘못으로 설계 변경이 발생했는데도, 설계자와 시공자 사이에서 예산을 늘리고 공기를 연장해야 하는 어려움은 발주자의 몫이 된다.
스마트한 발주자라면 시공 전부터 본인이 요구한 설계가 완벽히 구현되었는지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 발주자는 건설 분야에 전문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이 이런 역할을 해내려면 버거울 수밖에 없다. 설계사는 발주자의 충실한 대리인 역할을 해서 완성도가 높은 설계도를 생산하고 건설사는 설계자가 생산한 설계도서대로 시공을 해주면 발주자가 편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설계나 시공은 서로 상대방의 업무를 잘 모른다.
특히 설계자는 원가에 대한 감각이나 지식이 모자라고, 공사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여 디테일을 잘 모른다. 이 두 가지는 건설 프로젝트의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기술이 발달하면서 수많은 전문업체가 분화되었는데, 이들을 잘 종합하고 서로 협력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발주자 혼자서 이런 문제를 전부 해결하고 상호 조율을 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힘들다.
이러한 배경에서 설계 지식, 시공 지식, 프로젝트 관리 방식에 전문 지식을 모두 갖춘 프로젝트 관리자(PM/CM)가 미국에서 1960년대부터 등장하였다. 프로젝트 관리자에 의한 건설 수행 방식이 이제는 글로벌 건설 시장의 보편화된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프로젝트 관리자가 건설 시장의 보편화된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프로젝트 관리자가 건설 사업을 수행하면서 설계와 시공 간 단절 현상을 해소할 수 있게 되자, 이해관계자들 간 커뮤니케이션, 의견 조율 이슈가 더 중요해졌다. 프로젝트 주체가 지닌 약점과 프로젝트 주체 간 이해관계 충돌을 조정해나가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발주자 자체 팀을 구성하거나 PM/CM팀을 외부에서 고용하여 전체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관리하고 있다.
PM/CM의 도움으로 발주자는 생업이나 자신의 핵심 비즈니스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병원을 잘 경영하여 성공한 의사가 자신의 병원 건물을 짓고자 한다면, 어설프게 자신이 직접 공사를 주도하겠다고 나섰다가는 큰코다치기 쉽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좋지 못한 결과를 얻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경우 건설 프로젝트 관리 전문가인 PM/CM에게 건설 과정을 맡기면, 자신은 생업이자 핵심 분야인 병원 운영에 전념할 수 있다.
건설 프로젝트는 속성상 복잡하고 많은 이해관계자가 참여하기 때문에 철저한 관리가 필수적인 사업이다. 발주자들은 인식을 바꿔서 건설은 시공이 핵심인 사업이 아니라 ‘관리를 하는 사업’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프로젝트 관리 기법의 발전
미국은 프로젝트 관리 기법으로 대변되는 PM/CM 발상지다. 1960년대에 미국의 몇몇 공공 기관들이 만성적인 공기 지연과 예산 초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PM/CM 방식을 시범적으로 도입한 것이 PM/CM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PM/CM은 발주자의 니즈(Needs)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 기법이며, 공공에서 먼저 도입함으로써 산업 전체에 자연스럽게 정착될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발주자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든 제도와 기법이다.
이후 민간 부분으로 점차 확대되었고, 기술 인력을 자체적으로 보유하지 않은 개발업체(developer)들이 PM/CM 회사를 아웃소싱 하여 적극 활용함으로써, PM/CM 제도가 매우 자연스럽게 미국 내에 확대되었다. 미국의 PM/CM 기업들은 중동 지역의 대형 도시 개발 프로젝트와 미국 내에서 정부 발주 프로젝트가 충분했던 레이건 정부 시절인 1970년대, 1980년대에 PM/CM 기술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건설 프로젝트의 성격이 전문화, 대형화되었고, 건설 공사에서 공기 단축과 원가 절감 필요성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전래적 공사 수행 방식에서 빚어지는 전문 관리 기능 부족과 공사 참여자들 간 적대적인 관계가 점차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여러 문제점들의 해결책으로 새로운 공사 수행 방식인 CM이 등장하게 되었다. 때마침 경영학, 산업공학, 전기ㆍ전자공학, 기계공학 등 타 분야에서 파생된 이론과 기법들이 건설 공사에 계획, 관리, 시공 과정에 활용되면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건설산업에서 프로젝트 조달은, 전통적인 조달 방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달 유형이 여러 공사 형태에 맞게 장기간에 걸쳐 발전되었다. 특히 건설 프로젝트의 대형화, 복잡화 경향에 따라 예산 증가, 관리직 인원 팽창, 품질과 안전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PM/CM 계약 방식은 발주자와 변화하는 건설산업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적용 발전되었다.
당시 미국연방조달청(GSA) 산하 PBS에서는 설계ㆍ시공간의 기간 단축, 고품질의 시공 실현, 건설 공사 비용 절감을 목표로 하여 민간 분야에서 적용하고 있던 새로운 건설 공사 수행 방식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기존의 전통적인 계약 방식에서 오는 불합리함을 인지하고,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단계별 시공(phased construction) 수행, 다수의 주 도급자(multiple prime contractor)와의 계약 체결 방안, 고층 건물이나 복합 건물, 기타 500만 달러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에 대해 민간 전문 업체에 의한 CM 방식 도입 권고 등이 포함된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이후 CM 방식에 의한 계약이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977년에는 CM 방식을 적극 옹호하는 핸드북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공공에서 주도하는 관공사의 CM 계약 제도는 초기에 몇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경험과 조직력을 갖춘 CM 업체가 부족하고, 책임과 권한 이양이 불명확했으며, CM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제대로 된 CM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GSA는 1979년에 CM 계약을 중지하였다. 이러한 GSA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CM 계약 방식은 쇠퇴하기는커녕 오히려 민간 및 공공 부문의 건설 프로젝트에 급격히 도입되었다. 마침내 GSA에서도 1983년에 품질 관리(Quality Management)에 가까운 CM 계약 제도를 다시 채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CM 제도가 활성화 되면서 CM 교육의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공공 분야의 사업에서, 민간 CM 업체는 충분한 책임을 질 수 없었고, 이에 따라 1980년부터는 GSA/PBS 위원회의 사전 승인 없이는 CM 용역을 발주할 수 없도록 정책이 변경되었다.
GSA/PBS에서 발간한 『건설사업관리 가이드(Construction Management Guide)』를 살펴보면, CM의 책임 사항과 형평에 맞게 CM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사실상 순수한 컨설턴트나 업무 조정자의 역할만 수행하도록 책임과 권한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융통성을 가지고 다양한 CM 방식을 접목시키는 민간 부문과 달리 기관의 제도나 법규의 제약을 받는 공공 공사의 특성에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