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설계 품질

프리콘

우리나라에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같은 프로젝트 관리 방안에 대한 인식은 공공이나 민간을 가리지 않고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국내 발주자의 일반적인 인식은 설계는 설계회사에서 하고 시공은 시공회사에서 도면대로 시공하면 된다는 수준에 그친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당초 발주자가 세웠던 원가 목표, 공기 목표, 품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도면을 설계회사에서 적기에 공급하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근본적인 문제가 시작된다. 이러한 현상에 관행처럼 만연해 있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건설 프로젝트에서 설계 도면을 작성하는 행위는 고도의 전문적인 영역이고 잘못된 설계 도면에 의해 건물이나 시설물이 지어질 경우 심각한 폐해를 초래할 수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설계자의 잘못이 초래한 엄청난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렇듯 부실한 설계 도면이 공공 안전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심각하다. 우리나라에서 불건전한 설계 행태가 성행하게 된 근저에는, 설계(디자인)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는 문화적 배경, 질보다는 양적 측면에 치우치는 사회적 제도와 산업적 배경, 여기에 더하여 수주 위주의 운영을 하면서 설계 품질을 높이려는 노력에 소극적인 설계회사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설계자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제도적인 틀이 미비한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행은 설계비 수가가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고, 그나마 낮은 설계 수가도 저가 경쟁과 덤핑 수주로 제 살 깎아먹기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게다가 예술로 취급되어야 할 건축 설계나 엔지니어링 업무조차도 수주 과정에서 일부 부패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올바른 경쟁을 무력화시키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국내 설계회사에서는 계획 설계(Schematic Design)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각 공종별로 나누어 하청을 주는 사례가 다반사다. 이에 반해 미국 등 건설 선진국의 설계회사는 설비, 전기, 구조 설계 등 엔지니어링 분야는 외주를 주기도 하지만(대형 설계 회사는 이마저도 자체 설계하는 곳이 꽤 있다.) 건축 설계는 거의 100% 자체 설계를 한다. 하청으로 설계 품질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민간이든 공공이든 건물이 완공된 상태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 설계 결함이 발견되면 여지없이 설계회사에 중대한 법적 책임을 묻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건물 외부 계단에서 넘어져 다친 경우에도 설계상의 오류가 있다고 판단되면 설계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다.

잘못된 설계나 시공에는 법적 책임도 부과되지만 보험 시스템에서도 악화와 양화를 구분하여 보험요율을 차별 적용하는 자체 정화 시스템이 작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CM협회(CMAA, Construction Management Association of America)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발주자의 92%가 설계사의 도면이 시공에 적합하지 않다고 답변하였다. 미국에서조차 이 같은 통계가 나오는 것은, 대부분의 설계사가 시공방식이나 디테일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원가에 대한 지식이나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는 설계 잘못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거나 설계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 그런 탓에 설계도면 생산이 대부분 영업이나 손익에 맞춰 이루어지고, 설계도 작성 과정에서 프로정신(Professionalism)을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설계 진행시 설계 도면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을 뿐 아니라 건축, 구조, 설비, 전기 도면 간 코디네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원가나 시공성이 검증되지 않은 미완의 도면들이 건설 현장에 공급되는 실정이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설계 도면이 시공을 위한 도면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외국전문가들은 직무유기(Negligence)라고 표현하고 한다.

시방서 작성은 설계사의 중요한 업무이고 매우 전문적인 영역인데도, 국내 설계업체에서는 이를 전문적으로 작성하는 기술자가 없다. 그 결과 품질도 많이 떨어지고 시방서 자체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한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설계, 시공, 원가, 자재, 장비, 공법에 통달한 전문가가 시방서를 작성한다. 그래서 내용이 매우 디테일하고 구체적이며, 특정 제품을 언급하며, 언급된 제품과 동등의 제품(or equal)을 쓰도록 명기한다.

그래서 해외 프로젝트에서는 계약서의 우선순위를 규정할 때 통상 시방서가 도면보다 우선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시방서에 언급되는 제품이 자재나 장비 납품업체의 로비 대상이 되기도 하고 부패가 개입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발주자는 설계자에게 구체적인 자제 선정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디자인의 일관성과 완성도를 제어하게 되며 결국 성공적인 결과 도출을 막는 원인이 된다.

건설사는 시방서나 도면이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도면대로 시공하는 대신에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편한 방식을 적용해서 시공하기도 한다. 그 결과 설계사와 시공사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프로젝트를 부실하게 만들고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의 글로벌 기업 발주자나 글로벌 건설 기업들조차 도면 없이 조각 도면으로 시공하는 것을 패스트트랙 방식이라 여기며, 공기 단축을 목표로 밤낮없이 돌관 작업을 일삼는다.

그 결과 설계 변경에 따른 재작업과 과다 또는 과소 설계에 따른 막대한 시행착오 비용이 발생하곤 한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프리콘 활동이 제대로 되지도 않고, 적합한 프로젝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주요 건물이나 시설물에 피어 리뷰(peer review) 제도가 적용되어 제3자 검증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상호 간의 책임과 역할을 엄격히 관리한다. 국내에서도 이를 본떠 이와 유사한 설계 검토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유명무실한 상태다. 또한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설계와 시공이 분리되어 있고, 시공자가 설계단계에 참여하는 IPD(협력적 프로젝트 수행 계약)나 파트너링 등의 선진 방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선진 방식 도입 시 프리콘 활동을 가능하게 하여 설계 품질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국내의 설계 품질이나 경쟁력 수준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자면, 선진 수준에 비해 턱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관련 제도와 발주자 및 관련 업계의 인식 수준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 저가 수주 경쟁의 결과로 빚어진 낮은 설계 품질이 우리 건설산업의 경쟁력을 낮추는 데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고 있다.

1) 패스트트랙(fast track)은 설계와 시공이 동시에 진행되는, 고도의 설계 능력과 매니지먼트 능력이 필요한 기법이다. 전체 건물에 대해 개념 설계(concept design), 계획 설계(schedule design)를 완료한 후 공사 순서에 맞춰 설계를 완료한다. 예를 들면, 토공사를 할 때 지하 골조 공사에 대한 나머지 설계를 완료하고, 지하층 골조 공사를 할 때 지상 골조 공사에 대한 설계를 완료하는 방식이다.

2) 돌관 작업(突貫作業)은 지연된 공기를 만회하거나 공기를 단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당초 작성한 공정표보다 인력, 자재, 장비 및 작업 시간을 초과 투입하여 기간을 단축하는 방식이다. 공기 단축은 가능하지만 공사비가 증가하는 단점이 있다.

3) IPD(Integrated Project Delivery)란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 컨설턴트가 하나의 팀으로 구성되어 사업 구조 및 업무를 하나의 프로세스로 통합하여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모든 참여자가 책임 및 성과를 공동으로 나누는 발주 방식을 의미한다.

4) 파트너링(Partnering)이란 영국에서 주로 운용되고 있는 발주 방식으로, 미국에서 통용되는 IPD 방식과 거의 유사하며, 각 프로젝트 참여자들의 협업, 파트너 정신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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